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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떼

안나푸르나 라운드[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2.

참 오래되었다. 히말라야를 꿈 꾼지... 언제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버스안에서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문득 히말라야로 떠나야지,했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그 꿈은 여전히 봉인되어 배낭 속에 갇힐 수 밖에 없었다. 현실과 꿈의 시차(時差)다. 그러다 기적처럼 직장을 오래 다닌 것이 벼슬이 되어 회사에서 씽크데이즈를 선물로 받았고 난 망설임없이 배낭을 꾸려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다. 
네팔에 도착하여 돌아올 때 까지 45일 동안 ‘눈의 거처’ 히말라야를 두 번 올랐고. 카투만두와 포카라 곳곳을 로컬버스와 자전거로 또는 걸어서 여행을 했다. 지금부터 쓰는 이 글은 그 중 ‘안나푸르나 라운드(Annapurna Circuit Trek)’ 14박 15일에 대한 여행기이다. 

안나푸르나 푼힐(3박4일)에 다녀온 후 포카라(네팔 최고의 휴양도시이며 안나푸르나 트렉루트의 출발지이자 마지막 지점이되는 ‘트레킹의 허브’)에서 어슬렁거린지 일주일 째, 이후 트레킹에 대한 정보를 얻을까하고 한국식당에 들렀다가 라운딩을 하기로 결정. 처음엔 포터만 데리고 혼자 가려했으나 그 곳에서 만난 한국 청년 셋(남자2, 여자1)과 함께 가기로.. 다음 날 다시 만나 트레킹 허가서를 받고(4,000루피*20=약 80,000원) 산행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 등을 구입.

10월 10일
새벽  5시30분. 내가 묵은 숙소에서 일하는 네팔총각 R이 방문을 두드려 깨워준다. 내가 가는게 못내 아쉬운지 시무룩한 표정이다. 고맙게도 잘 다녀오라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끓여 내 준다. 일부러 시간 내어 잠시 수다. 산촌다람쥐(한국식당)에서 함께갈 일행 세 명과 포터 두 명을 만나 짐을 나누고 8시에 출발. 두 번의 로컬버스(이게 참 재미있다. 닭도 타고 염소도 타고 신사 숙녀도 타고 트레커들도 탄다. 닭과 염소가 똥도 눈다. 사람만 서 있으면 아무데서나 사람 태우고 자리없으면 지붕에도 태운다)를 갈아타고 6시간만에 트레킹 첫 시작지인 부블레에 도착. 막 산길로 들어서는데 예닐곱 꼬마 산적들이 보자기로 길을 막고 통행세를 요구한다. 꼬마들의 무기는 춤. 공연료라도 내야할 판. 우리 일행 모두 기꺼이 지갑을 꺼내 통행세를 내고 통과.포터는 무료란다. 안녕. 귀여운 꼬마 산적들.


한 10분 쯤 더 가자니 웬 떠꺼머리 총각 하나가 장부를 들고 개울 앞에 서 있다. 뭐라뭐라 하는데 말인즉슨  지난 여름 홍수에 사라진 다리 대신 자기가 징검다리를 놓았으니 이용료를 내라는 것. 싫다,우리는 징검다리로 건너지 않고 그냥 물을 건너겠다.......... 했지만 그럴 만 하지가 않아 뒤를 흘깃거리며 징검다리를 밟고 건넌다. 그 총각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종환씨가 한마디 한다. “이런 이런...꼬마들 보다도 못한....” 미안,총각.

부블레를 지나 나디까지 가는 도중 마나슬루의 웅장한 모습에 넋을 잃다.나디에 도착, 고마네 롯지에 짐을 풀다(고마는 롯지 주인 딸로 아주 예쁘다. 우리 포터가 좋아하는 눈치다. 고마 옆에서 내내 부엌일을 거든다)저녁으로 플레인 빵과 볶음밥을 먹었는데 음식이 대체로 맛있다. 핫샤워라 써 있어 좋아했더니...젠장...창도 없는 버스로 비포장 길을 달리느라  하루종일 뒤집어 쓴 먼지만 겨우 씻어내고 잠자리에 든다. 낮에는 반바지만 입고 움직여도 될 정도지만 산 속의 오후는 초겨울이다.
포카라->부블레->나디(8시간)

10월11일
얼기설기 엮인 천정에서 밤새 쥐가 찍찍거려 내 얼굴로 떨어질까 봐 잠을 설쳤다. 8시 나디출발, 평탄한 길이 마르샹디강을 따라 이어지다 바훈단다까지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바훈단다에서 점심을 먹고 움직이다 보니 오락가락하던 비가 금세 소나기가 되어 1시간 정도 쏟아진다. 온 팔뚝에 문신이 있는 근육질 맨과 스무살 정도나 됐을까 한 서양아이들 둘이 길가에서 기세 좋게 마리화나를 한다. 이건 뭐 담배 처럼 말아 피우는 것도 아니고 퉁소처럼 생긴 큰 물건 속에 넣어 하늘을 향하고 뻐끔거리니 기세좋달 수 밖에.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속 만났는데 우리도 내려 온 급 경사를 근육맨은 배낭을 줄에 걸어 먼저 던져 내리는 등 요란을 떨다가 문신이 부끄럽게도 궁둥이에 의지해 내려오는 바람에 그만 체면 다 구기고 만다. 문신을 파스로라도 감추는게 어떠실지?
오늘은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 바로 옆 샹제의 New-Water Fall롯지에서 짐을 푼다. 어제 나디의 롯지보다 깨끗하고 무엇보다 따뜻한 물이 나와 샤워를 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폭포소리가 장난 아니다. 추워 따뜻한 물을 한 잔 달랬더니 돈을 받는다.   나디->바훈단다->샹제 (8시간)

10월12일
아침에 일어나 비가 오나....했더니 폭포에서 이는 물보라다. 샹제 8시 출발. 산사태의 흔적인 듯 돌무더기의 산허리를 감고 도는 오르막으로 비교적 험한 코스다. 은정씨가 계속 처진다.가이드 북의 일정대로라면 다라파니까지 가야하지만 은정씨의 상태를 고려하여 탈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한다. 탈은 호수란 뜻으로 예전에 이 마을이 호수였다더니 마을이 사방 높은 산 속에 퐁당 빠져있는 모양세다. 오늘의 일정을 일찍 마친 덕에 빛이 있을 때 빨래를 해 널고 나니 밀린 숙제를 마친 것 마냥 홀가분하다. 저녁이 되면서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방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들 불이 있는 부엌 아궁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불을 쬔다. 한 옆에서는 노인이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고 은정,병철,종환씨는 두명의 프랑스 젊은 아이들과 수다 떨며 웃고 나는 주인 아주머니를 도와 콩을 까고 있자니 꼭 겨울 밤 사랑방에 앉아 있는 것 같아 정겹다. 부엌에 앉아 음식 만드는 전 과정을 지켜보니 산 속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왜 1시간 이상이 걸리는 지 이해하겠다. 주문하면 그때부터 마늘 까고 콩 따오고 사과 따오고(애플파이가 맛있다)밀가루 반죽하고 밀대로 밀고.....아궁이 하나에서 밥하고 볶고 튀기고,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느릿느릿 전 과정을 정성스레 잇는다.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네 명이 메뉴를 통일하기로 결의. 샹제->자가트->참제->탈(6시간)

10월13일
8시 탈 출발. 오늘도 제법 험하고 가파르다. 다라파를 지나 바가찹에 이르니 안나푸르나2봉(7,937m)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의 아찔한 길’ 쯤의 깎아지른 절벽을 지나고 폭포수 아래를 물을 흠뻑 맞으며 지나기도. 곳 곳에서 만나게 되는 나귀들의 행진은 점령군처럼 당당하다. 햇빛은 강한데 역시 가을은 왔나보다. 쉴 때 바람이 제법 차다. 안 그래도 숫자에 약한 내가 달러에서 루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돈 계산을 잘 못하여 돈을 넉넉하게 가져오지 못하는 바람에 돈을 아낄 데라고는 먹는 거 밖에 없어 슬프다. 잘 먹어야 이 험한 산 속에서 살아남을 거 아니냐고. 덕분에 매일 점심은 스프에 밥만 주문해 말아먹고 있다. 개 죽이 따로 없다. 다른 팀들 거하게 먹는거 보며 입 맛만 다실 수 밖에.
어제 밤새 기침을 하던 우리 옆방의 손님(아마도 다른 팀의 포터인 듯)은 괜찮을까. 그 기침 소리에 나도 잠을 못 이루었는데 본인은 오죽 했으랴.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내가 준비해 온(구름재님이 챙겨주신)기침약을 주려 했으나 어쩌다 보니 놓쳐버렸다. 그 상태로 18일 정도나 되는 일정을 어찌 마칠꼬. 일정이 늦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가이드북의 일정대로 움직이고 싶으나 처지는 일행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내일 기준 벌써 하루가 늦어졌다. 다나큐를 지나려는데 롯지 주인이 자고 가라고 부른다. 오늘 더 가면 롯지가 3개 밖에 없어 방이 없을 수도 있다하니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다 내일 더 일찍 움직이기로 하고 오늘 이곳에서 머물기로 한다. 그러지 않아도 쉬고 싶을 만큼 전망이 끝내준다. 눈으로 모자를 쓴 안나푸르나 2봉이 주위를 두르고 있다. 호객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어제 보다 방도 깨끗하고 부엌도 정돈되어있고 따뜻한 물도 나온다. 음식도 맛있다. 포터인 나래스가 계속 뒤처진다. 몸 상태가 안 좋은건지 걱정. 호리호리 많이 말랐다. 사려 깊은 눈을 가진 스무살의 젊은 아이다.또 다른 포터 나제스(우리나라 영수,용수 쯤 되는 비슷비슷한 이름으로 두 사람 가려 부르기가 무지 힘들다)는 일명 똥싼 바지를 입어 늘 아슬아슬하다. 엎드리거나 배낭이 올라가면 엉덩이 계곡이 다 드러난다. 쫒아가서 확 추켜올려주고 싶지만 참는다. 생긴 건 로마시대 검투사 같이 생겨가지고 똥 싼 청바지라니. 젊은 애는 젊은 애다. 하긴 이제 겨우 스물 한 살이라하니.
오늘도 우리는 늦도록 부엌에 앉아 각자의 여행이야기로 웃고 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