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파더>/소설<파더> 2장

[소설 '파더'] 제2장 어떤 편지

by 뉴클리어 2011. 3. 21.
 

준산이가 서울 들렀다는데?”

승갑과 막 통화를 끊낸 세훈은 호텔 로비를 나서며 영옥에게 말했다.


“어저께 공사에서 강연이 있어 청주 간다고 하던데, 온 김에 사돈댁에 들렀나 봐요” 세훈에게 답을 한 영옥은 보스턴백을 호텔 직원에게 건내주고서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마닐라 해리티지 호텔 현관 입구에는 경남개발 필리핀 지사에서 마련해 준 4000cc 급 BMW 승용차가 있었다. 50대 중반 쯤 보이는 운전수가 세훈과 영옥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는 뒤 트렁크를 열었고 호텔 직원은 세훈과 영옥의 캐디백과 보스턴백을 차곡차곡 넣었다. 세훈과 영옥이 차 뒷좌석에 오르자 현관 옆에 대기 중이던 두 대의 경찰 싸이카가 미끄러지듯 세단 앞으로 다가갔다. 경찰 에스코트를 받은 BMW 세단은 호텔을 빠져나와 리베라골프장으로 향했다. 골프장을 가기 위해서는 마닐라 한 복판을 통과해야 했는데 점심시간 전이었는데도 시내는 혼잡했다. 에스코트 하는 경찰은 길을 열기 위해 도로를 가로 막고 있는 찌프니를 손으로 툭툭 치는가 하면, 운전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손가락질을 하며 험한 표정을 지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 참 희안해요, 돈이면 경찰도 살 수 있으니”

영옥은 혼잣말처럼 말하고선 복잡한 시내에서 길을 열기 위해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경찰 싸이카를 유심히 쳐다봤다.


“대통령도 2천만원이면 부를 수 있어,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나라지, 어떻게 보면 살기 좋은 나라야 필리핀은, 현명하지, 경찰들까지 나서 외화벌이 하잖아, 대한민국 좀 봐 이건 뭐 돈을 쓸래도 쓸 수가 있나, 내 돈 내가 쓰면서 눈치 봐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야, 부자가 하루에 몇 천만 원을 쓰든 몇 억을 쓰든 그게 서민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쓸 형편이 되니 그러는 거 아냐, 그거 인정하는 게 자본주의 아냐, 근데 이건 뭐 부유층들이 돈 많이 쓰면 많이 쓴다고 지랄, 안 쓰면 지갑 안 연다고 지랄, 하여간에 우리나라는 빨갱이 새끼들 때문에 될 일도 안 돼” 세훈은 은단 몇 알을 입 안에 탁 털어 넣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도심을 빠져 나오자 경찰 싸이카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40여분을 달리자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안 절벽을 따라 2차선 도로가 나 있었는데 두 개의 언덕을 넘자 멀리 클럽하우스가 보였다.
리베라골프장의 클럽하우스 위치나 코스 레이아웃은 독특했다. 클럽하우스를 지나야 필드가 한 눈에 펼쳐지는 일반 골프장과는 달리 클럽하우스까지 가는 도로 주변으로 홀이 펼쳐져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골프장이 클럽하우스를 중심으로 아웃, 인 코스가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해 리베라골프장은 아웃코스가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고 인코스는 그 안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을 각 홀마다 다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클럽하우스 현관 입구에는 조상일보 유근삼 정치부장과 집권 여당인 한민당 정책위의장인 심재천 의원이 이미 먼저 와 옷을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심재천 의원의 새파란 원색 반팔 티가 시원스럽게 보였다. 티업 시간 한 시간 전이었다.
골프장은 한산했다. 100평 규모의 클럽하우스 식당에는 손님 보다 종업원들이 더 많았다. 서너  팀 정도가 식사 중이거나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동양계인 듯 했다. 


“박시원 대표는 뭐라고 하던가요” 심재천은 막 나온 두툼한 프리미엄급 립아이 스테이크 한 쪽을 나이프로 짜르며 맞은 편에 앉은 원세훈에게 물었다. 세훈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구 민주당 의원들은 관심을 보이는데, 소장파하고 노무현 아이들에겐 말도 못 꺼내는 모양이야, 하기사 쉽게 꺼낼 수 있겠어, 바로 사꾸라로 몰릴 텐데”라고 말했다. 세훈은 종업원이 따라 준 2004년산 샤또 라피드 로쉴드 포도주를 입 안에 한 모금 넣고서는 이리저리 굴렸다. 


“잘 안 되면 한 물 간 애들 있잖아요, 지금 민주당에서 소외된 애들, 이런 애들과 엮는 방법도 있을 거에요,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한다고 봤을 때, 자민당과 민주당 구파 애들까지 보면 되겠군요” 영옥이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아마 그럴 껍니다.” 재천이 재빠르게 말했다.


“그럼 선배님 민주당 현역들은 몇 명 정도 따라온다고 보면 됩니까” 그때까지 듣고 있던 유근상이 3년 대학 선배인 세훈에게 물었다.


“최소한 20명은 될 꺼야, 그럼 우리 쪽은 박은혜 계 40명 정도 빠진다고 보면 되나?” 세훈은 칼질을 잠시 멈추고선 재천을 바라다 보았다.


“아닙니다, 우리 쪽에도 민권21 소속 10여명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재천은 세훈을 보고 그렇게 말하고선 포도주 잔을 들었다. 나머지 세 사람도 잔을 들어 살짝 부딪혔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아냐, 아냐, 걔들은 신경 안 써도 되, 그것들 이미지 관리한다고 지랄하는 거지 막상 판이 열려봐, 못 들어와서 난릴꺼야, 오히려 그 새끼들이 민주당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야 그 새끼들 말만 번지르 했지 어디 끝까지 가는 거 한번이라도 봤어? 많아봤자 이탈할 놈은 두 서너 명밖에 안 되” 세훈의 말이 거칠어지자 영옥은 칼질하다 말고 세훈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미래연대 쪽에서도 두 명은 확실합니다” 주위를 한 번 둘러 본 재천은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음, 그러면 우리쪽 140에 민주당 20 자민당 17....177명이고 저쪽은 민주당 70에 박은혜가 40, 미래연대 여섯, 110명 쯤 되네, 봐 한 번 해 볼만 하잖아, 얼마나 좋아, 이 썩어빠진 지역구도 한 방에 해소되잖아, 영삼이는 호남을 배제했지만 우리는 호남을 안고 가자는 거야, 그나저나 모자라는 20명에 대한 대책이 빨리 나와야 돼, 당에서는 준비하는 거 없어?”


“당에서는 박은혜계와 미래연대를 집중 공략할 예정입니다. 미래연대는 공천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입당시켜 관리하고, 박은혜계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충성도가 떨어지는 의원들 위주로 입각이나 공천 보장을 걸면 개헌정족수는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민정수석과도 다 얘기가 된 겁니다” 세훈과 재천은 머리를 앞으로 숙여 누가 들을세라 최대한 목소리 톤을 낮췄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게 있죠, 만약 저 쪽에서도 공동정부를 구성한다며 선거에서 연합해버리면 어쩌냐는 거죠. DJP연합 처럼요. 그러면 개헌을 한다고 해도 정권재창출은 힘들게 아닙니까” 계속 듣는 쪽이었던 조상일보 유근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하하하, 그건 우리 부장님이 너무 나간거야, 박은혜하고 노무현 아이들하고 손을 잡는다고, 하하하, 노무현 아이들이 주구창창 외치는 게 명분이요 선명성인데 절대 그럴 리는 없어, 그 쪽 지지자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걔들이 손을 잡는 순간 정치생명은 끝이라 보면 되, 그리고 우리는 명분이 있잖아, 고질적인 지역감정 해소, 정치발전, 뭐 이런 거라도 있는데 걔들이 연합하면 무슨 명분이 있어, 단순히 선거용, 우리한테 대항하기 위한 이합집산 밖에 안 되는 거잖아, 역풍이 만만치 않아요. 아니 우리 부장님부터가 가만 계시겠어? 한 방 쌔끈하게 터뜨려주시면 끝이잖아, ‘정치권 이합집산 이래도 되나?’란 식으로 사설 몇 개 때리고 기획기사 쭉 나가면 걔들이 배겨나갈 수 있겠어 하하하”


“하기사 그건 그렇습니다. 하하하” 세훈과 유근상이 주위를 돌아보며 큰 소리 웃자 재천과 영옥도 따라 웃었다.


“우리의 1차 목표는 내각제로의 개헌이야. 하다가 안 되면 이 동력으로 호남세력과 연합하여 정권 재창출하면 되는 거야, 박은혜에게 넘어간다고 생각해봐, 야당에게 간다고 해봐, 소름 안 돋아" 세훈의 말을 듣고 있던 세 사람은 실제로 닭살이 확 돋았다.


“우리나라 국회도 이제 선진국형으로 가야 돼, 보수와 진보로 딱 나누어져야 한다고, 경상도 보수, 전라도 보수 이렇게 딱딱 뭉치고 전라도 빨갱이, 경상도 빨갱이들도 지들끼리 뭉치고, 이렇게 해야 장기적으로 정치가 발전하는 거 아니겠어” 세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27홀의 넓은 골프장에는 원세훈 조를 포함한 다섯 팀만이 라운딩 중이었다. 아웃코스 1번 홀은 페어웨이가 넓었다. 레이디 티에서 영옥의 티샷이 끝나자 네 사람은 카트에 올랐고 그 뒤로 네 명의 필리핀 현지 캐디를 태운 카트가 따랐다.


점심 무렵 햇살은 따스했다. 식사를 마친 준산은 장모, 상희와 함께 정원 한 켠 30년생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수석은 승갑이 손자를 위해 특별히 주문 의뢰해서 제작한 원목그네에 올라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 겠습니다.” 준산은 시계를 슬쩍 보더니 장모를 향해 말했다. 준산은 석이 있는 그네 쪽으로 다가가 007가방을 왼손으로 옮기더니 오른 팔로 석을 벌쩍 들어 안아 상희가 있는 쪽으로 다시 왔다.  


“잘 있을 테니 걱정 말고 푹 쉬었다 와” 그렇게 말하고선 석을 안고 대문 쪽으로 향했다. 장모와 상희는 한 걸음 쯤 떨어져 따라갔다. 대문 가까이 오자 준산은 아들 석을 내리고선 상희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상희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미안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준산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 가 보겠습니다. 상희 좀 잘 부탁드립니다” 준산은 활짝 웃으며 장모에게 다가가 오른팔로 살짝 안았다.


“아이고....이런 내 새끼”

그런 준산이 사랑스럽고 대견한 듯 장모는 목을 준산의 어깨에 걸치고선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래, 끼니 잘 챙겨 먹고, 도착하면 꼭 연락하게나, 밑반찬은 택배로 보내겠네” 장모는 그렇게 말하면서 약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준산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온 아들 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는 대기 중이던 콜택시에 올랐다. 수석을 안은 상희는 준산이 탄 택시가 골목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바라보았다.
골목 입구 가은식당까지 천천히 내려 온 콜택시는 대로로 들어서자 속력을 내 서울역 쪽으로 달렸다.


준산은 차창 밖을 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휙휙 지나는 콘크리트 건물, 간판, 사람들이 여전히 낯설게 여겨졌다. 준산은 휴대폰 폴더를 열어 영옥에게 전화를 걸려다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닫았다. 공군사관학교 강연으로 청주 갈 일이 생겼다고 안부 인사 겸 영옥에게 전화했을 때 의원 외교 차 일주일간 필리핀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게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준산은 다시 휴대폰 폴더를 열더니 꾹꾹 눌렀다.


“응, 오아버니” 재희는 입 안에 뭘 머금고 있는 듯 우물거렸다.


“잘 있었어” 준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다정했다.


“나야 잘 있지, 근데 어쩐 일이래? 오빠가 전화를 다하구”


“역삼동 갔다가 부산 내려가는 길이야”


“정말! 언제 왔는데? 아니 그건 그렇고, 그래서, 이제야 연락하는 거야! 아하, 탑건되면 동생도 모르는 구나, 진짜 하나 뿐인 동생 얼굴도 안 보고 그냥 내려간단 말이야” 비아냥과 원망이 섞여있는 재희의 목소리였다.


“응, 일이 좀 그렇게 됐어, 미안하다” 준산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한숨은, 혼자 왔어? 언니는?”


“같이 왔는데, 나 먼저 내려가고 니 언니는 며칠 더 있을 꺼야”


“그나마 다행이네, 내 얼굴도 안 보고 그냥 내려간다길래 오빠 확 패버릴려고 했는데 아쉬운 대로 언니랑 회포 풀어야겠네” 재희의 목소리는 금새 밝아졌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는데 준산은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재희에게 물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냐?”


“만나는 사람? 마안치요, 만나는 사람이....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재희는 잠시 킥킥 웃더니 말을 천천히 늘어뜨리며 농담조로 답했다.


“농담하지 말고” 준산이 말을 끊었다.


“오빠! 오빠까지 자꾸 이러면 나 정말 확 숨어 버린다. 내 나이가 시방 많은 게 아니라고요오, 서른 하나면 청춘이라고요오 청춘!”


의상학과를 나온 재희는 졸업하자마자 굴지의 의류회사에 입사 해 핵심 부서인 디자인실에 배치 받았다. 꼼꼼하고 손매가 야무졌던 재희는 이내 능력을 인정받아 곧 잘 적응하는 듯 했다. 그렇게 한 몇 년 잘 다니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되지도 않는 퇴직금과 저축한 돈 딸딸 털어 후배 한 명과 의류 쇼핑몰을 시작한 지가 작년 이 맘 때쯤이었다. 준산은 재희가 적당한 시점에 좋은 사람 만나 빨리 결혼하기를 바랬다. 가정을 꾸려 평범한 살아주기를 원했다. 근데 재희는 아예 결혼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후배 중에 괜찮은 애 한 명 있으니 부산 한 번 내려와라” 준산의 목소리는 가라 앉아 있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희가 되 받았다.


“오빠, 됐거던요, 전, 군바리 싫거던요, 정말이거던요, 절대 아니거던요”


두 사람 사이에 또 다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준산이 무겁게 말을 꺼냈다.


“재희야” 


“.........”


그 소리가 너무 착 가라 앉아 재희는 잠시 당황스러웠다.


“너 혼자 있는 게 안 쓰러워서 그래, 자꾸 마음에 걸려”




 

재희는 준산에게 단순한 여동생이 아니었다. 같이 놀아 준 친구였고, 고민을 나누는 동료였고, 준산이 괴로워 할 때 보듬어 준 누이였다. 준산의 머리가 크고서부터, 어느 때부터인가 집안엔 냉기류가 흘렀다. 국회의원 보좌관 신분이었던 어머니는 정당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허다했고 오래 전 실직한 아버지 역시 집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 떠돌았다. 간혹 두 사람은 싸우기도 했는데 싸웠다기 보다는 영옥의 일방적인 외침이요 절규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 민수의 갑작스런 죽음은 고등학생이었던 준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총선을 코앞에 둔 영옥은 남편 읽고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자식을 돌 볼 시간이 없었다. 학원에서 먼저 온 재희가 파출부 아주머니가 해 놓고 간 식은 국을 데웠고 밥을 담아 상을 차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먹곤 했는데 준산은 동생이 차려 준 밥을 먹으면서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콜택시는 얼마 안 돼 서울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은 혼잡스러웠다. 준산은 역 내에 있는 패스트푸드 점에서 산 에스페레소 커피 한 잔을 들고 열차에 올랐다. 컵 홀더에 커피 잔은 올려놓은 준산은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의자를 약간 뒤로 젖혔다. 몸을 뒤로 누이니 편안하고 포근했다. 햇살이 따스해서인지 준산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지잉~, 지잉~’

진동으로 해 놓은 준산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3편대장 김성구 소령이었다. KTX 열차는 막 김천을 지나고 있었다. 준산은 한 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보더니 얼른 객실 밖으로 나갔다. 열차와 열차 사이의 공간에는 4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간이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고 늘씬한 키의 여자 승무원이 바퀴가 달린 이동식 판매대 내용물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있었다.


“예, 형님”


준산은 공사 3기수 선배인 성구에게 사석에서는 형님이라 불렀다. 성구는 준산이 사관학교 1학년 때 멘토 선배였다. 당시 공군사관학교에서는 1학년 생도들이 학교에 잘 적응하기 위해 4학년 생도들과 연결시켜 줬었다. 전라도 익산 출신의 성구는 성격이 서글서글했다. 준산은 성구가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힘들어 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런저런 조언과 충고를 해줬는데 준산이 처한 상황과 그리 딱딱 맞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친해지게 된 것은 1학년 2학기부터 시작된 야간 경계 근무 시간 때였다. 매주 수요일은 일반 병들을 대신하여 생도들이 야간 경비 근무를 섰다. 당직대에서 당직사관에게 근무 신고를 할 때 볼록한 성구의 배쪽을 보며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건 사관학교 후방에서 약 500미터쯤 떨어진 청명산 중턱에 위치한 근무지에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배 안 고프야~”라며  배 쪽에 감춰둔 쵸코파이며 스모그치킨 등 이것저것 먹을 것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준산은 음식보다 여태껏 표준말을 쓰던 성구의 입에서 나온 걸쭉한 사투리에 더 놀랐었다. 성구는 많은 얘기를 했다. 형님이 공부를 잘 했다는 것, 좋은 대학 법학과를 다녔다는 것, 판. 검사가 되기를 바랬던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는 것, 그런 형님이 학생운동하다 수배자가 되자 부친이 알아 누웠다는 것, 없는 살림에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학비가 없는 사관학교에 왔다는 것, 그래도 그런 형님을 원망하지 않는 다는 것 등등.... 일과 시간에선 늘 표준말을 쓰던 성구가 야간 경비 근무를 설 때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곁들여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는데 준산은 그게 그리 정답게 여겨질 수가 없었다. 동생이 없는 성구와 형이 없는 준산은 죽이 잘 맞았다. 준산은 이후 에도 친형처럼 성구를 받들었고 성구 역시 준산을 친동생처럼 여겼다. 준산이 청주 공군사령부에서 편대장 요원 교육을 받고 17전투비행단 209비행대대 막내 편대장으로 배속되었을 때도 성구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시방, 워디여? ”


“김천 막 지났습니다, 큭” 갑작스런 성구의 사투리에 준산은 웃음이 났다. 


“내 말이 웃기냐, 웃기면 좋제, 흐흐흐, 그려, 그럼 여섯 시쯤엔 도착하겠네, 부산역이여, 구포역이여”


“구포역 여섯 시 십분 도착입니다”
 


“잘 됐구마이, 구포시장에서 막걸리나 한 잔 하지, 괜찮어?”
 


“좋습니다, 형님”


“그라믄, 음, 여섯 시 삼십 분에, 시장 안에 왜 있잖여, 우리 그때 간 족발집....이름이 머더라”
성구가 잠시 머뭇거리자 준산이 바로 말했다.


“일번가 식당입니다.”


“그려그려, 그기서 보더라고, 근무 끝나는 데로 바로 갈 텡 게”


“알겠습니다, 형님”


전화를 끊은 준산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하는 성구가 -심지어는 자식들에게도 표준말을 썼다.- 사투리가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건 동향 출신의 아내와 부모님이나 형제들과의 대화에서였다. 그러니 아내와 대화할 때 전라도 사투리를 쓰다가 이어 자식들에겐 표준말로 말하곤 했는데 그 광경을 처음 본 사람들은 킥킥거리든지 의아해했다.


구포역 대합실을 빠져 나오자 시원한 비릿한 바다 바람이 준산을 휘감았다. 봄이었지만 저녁 무렵의 바람은 쌀쌀했다. 준산은 대합실 오른쪽 구두수선 집을 돌아 구포시장 쪽으로 향했다. 쭉 늘어선 가게들은 이제 본격적인 저녁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가게 안은 이미 등을 밝히고 있었고 마음 급한 주인장이 간판 전원을 켰는 듯 드문드문 입간판이며 입구 상단에 걸린 대형 간판이 몇 번 깜박이더니 훤해졌다. 돼지국밥 집 앞에 걸린 대형 가마솥에는 하얀 연기를 연방 내뿜고 있었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미장원에는 두서너 명의 아가씨가 머리 손질을 하고 있었다.


시장 입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늦은 장을 보러 온 사람들, 이미 얼굴이 불콰해진 허름한 옷차림의 노가다꾼들, 시장 내 식당에서 한 잔하기 위해 일행을 기다리는 등산객들이 섞여 시끌벅적했다.

구포시장이라 적혀진 아치형의 대형 입간판 왼쪽으로 꺽어 들자 두서너 평의 수산물 가게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고 간이 판매대에는 물미역, 호래기, 뼈를 발라 놓은 생멸치 등을 쭉 진열해놓고 있었는데 준산은 그걸 보자 갑자기 입맛이 당겼다. 일번가 식당에 들어서자 구석 한 쪽 사복을 입은 성구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예, 얼굴 까묵겟심미더”

선지국을 그릇에 퍼 담고 있던 50대의 여자 주인장이 준산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겼다.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통나무 테이블 예닐곱 개는 이미 다 차 있었다. 구석진 자리의 성구가 준산을 향해 손을 들자 준산도 그쪽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박 대위, 어여 와” 준산이 가까이 다가오자 성구는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일찍 오셨습니다.” 성구와 악수를 한 준산은 007가방을 옆 자리에 놓고선 큰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 만들었을 법한 의자에 앉았다.


“근무 끝나고 바로 왔어, 그래 간 일은 잘 됐어, 교수님들도 잘 계시고”


“예”


준산이 자리에 앉자 홀 일을 거드는 주인장의 남편이 채소며 쌈장, 새우젓이 담긴 조그만 종지를 테이블 여기저기에 놓았는데 얼굴이 뽁닥한 게 벌써 한 잔 걸친 모양이었다. 대부분이 단골들이라 반가운 마음에 손님들이 막걸리며 소주를 한 잔 씩 주는데 이 남정네는 거부하는 법이 없었다. 대충 음식을 차려 준 주인장의 남편은 그길로 근처 테이블로 가더니 아예 퍼질고 앉아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였는데 여자 주인장은 이를 보고도 내색하지 않았다.


“족발이랑 선지국 시켰어, 괜찮지”


“네 좋습니다.”


일만 원 짜리 족발, 사천 원 하는 선지국은 보기에도 푸짐했다. 
파란색 생탁 막걸리 뚜껑을 딴 성구는 준산 앞에 놓여 진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부었고 이어 준산도 막걸리 병을 건네받아 성구에게 따랐다. 두 사람은 살짝 잔을 부딪히더니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일 정도로 벌컥벌컥 마셨다. 달큰한 생탁 막걸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준산은 온 몸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성구는 입술에 묻은 막걸리를 오른 손으로 한 번 훑고서는 도톰하게 썬 족발 한 점을 쌈장에 듬뿍 묻히고선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비행대장이 상당히 불쾌한 모양이야, 대대장님은 어제 편대장들끼리 관사에서 인사차 뵈었는데 내색은 안 하지만 시방 뭐 모를 리가 있겠어, 니 안부를 묻던데 별로 좋은 표정은 아니더라고, 참나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 준산이 말없이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우려 하자 이를 본 성구는 급히 술병을 빼앗아 대신 따라 주었다 .


“재수 씨는 아예 짐 싼 겨” 성구는 그렇게 말하더니 찰랑찰랑하게 채워 진 막걸리 잔을 들었다.


“아닙니다, 며칠 쉬고 내려 올 겁니다.” 준산은 잔을 들어 성구의 잔에 갖다 대었다.


“그려, 그래야지, 이런 일은 빨리빨리 풀어 버리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여, 집사람도 솔찬허게 걱정하고 있더라고 중간에 끼어 가지고, 재수 씨가 눈 질끈 감고 잘못했심다하고 머리 숙여버리면 되는거여, 장교 여편네들이 무릎 꿇고 고참 사모들에게 비는 게 어디 드문 일이간디? 시부럴, 조종사 되면 비행기나 모는 줄 알았지....” 성구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가 작아지더니 끝에선 흐려졌다.


“비행대장님은 내일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그 날 갔었어야 했는데 야간 비행이 있으셔서, 다음 날 전 행사 때문에.....” 준산도 말끝을 흐렸다. 


“박 대위”


“예, 형님” 준산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기죽어선 안 돼, 이런 건 일도 아냐, 앞으로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생길 거야, 비행대장은 니가 이해해라, 새파란 쫄따구한테 밀리고, 어디 맘이 편했겠어, 니가 비행단 대표로 뽑혔을 때 나도 울화통이 터질 뻔 했승게, 그때는 너를 선택한 대대장님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고,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지만 말이시. 그라고 비행대장 진급 심사가 얼마 남지 않았잔여 내외의 신경이 보통 예민해져 있는 게 아녀” 눈에 약간 힘을 주고 말을 하던 성구는 빈 막걸리 병을 확인 하자 주방 쪽을 향해 소리 쳤다.


“아주머니, 여기 막걸리 한 통 더요, 아니 두 통 더 주세요”


탑건이 된다는 건 진급이 보장됨을 의미했다. 탑건이 되기 위해선 비행훈련, 비행경력, 작전참가, 사격능력, 비행안전 기여도 등 10가지 필수요소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아야 했지만 사실상의 판가름은 보라매공중사격대회에서 결정이 났다. 참가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비행단에서 최고 기량을 가진 대표 선수로 뽑혔기에 사격대회 외의 항목 점수는 별 반 차이가 없었다.

올 2월 오산공군사격장에서 열렸던 보라매공중사격대회에, 제17전투비행단에서는 한 명의 대표 조종사와 두 명의 예비 조종사로 팀을 구성하여 참가하였다. 209비행대대에서 두 명을 배출했는데 비행대장이 대표 조종사로, 박준산 대위가 예비 조종사였다. 예비 조종사는 당일 대표 조종사가 불가피하게 비행 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전담 교관은 비행단에서 유일하게 탑건에 선정 된 적이 있는 209비행대대장 최성훈 중령이 맡았다.

공중사격대회를 앞두고 작전을 겸한 세 번의 공중사격훈련에서 박준산 대위의 종합 평점은 8.53점으로 2위였다. 8.80점의 비행대장이 1위였고 타 비행대대의 편대장이 3위였다. 그런데 대회 당일 아침, 박준산 대위로 제17전투비행단의 최종 후보가 바뀌었다. 비행대장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당일 비행대장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비행단장도 대대장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급한 호출을 받은 대대장은 비행단장이 묵고 있는 오산 휴양소로 달려갔다. 대대장은 단장을 설득했다.

문제는 당일 기상이었다. 맑을 것이란 예보와는 달리 아침부터 가는 비가 내리더니 내내 흐려 게일 줄을 몰랐다. 대대장은 훈련 데이터를 단장에게 보였다. 비행대장이 종합 평점에서 박 대위 보다 나았지만 훈련할 때마다 점수 차가 크게 나타난 반면 박 대위는 세 번의 실제사격훈련에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장 앞에 놓여진 지각도에는 비행대장이 1차 9.5, 2차 8.2, 3차 8.7로 박준산 대위가 8.6, 8.5, 8.5로 나타나 있었다. 비행대장은 이어 세부 항목을 단장에게 보였다. 보라매공중사격대회는 시속 900여km의 속도로 63빌딩보다 더 낮은 150m의 초저고도 비행을 하면서 기관총으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전술사격, 2만 피터 상공에서 30∼45도 각도로 급강하하면서 목표물을 타격하는 일반사격 등 네 개 분야에서 치러지는데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은 2만 피터 상공에서 시속 1,000km로 급강하하면서 1m 짜리 목표물을 타격하는 것이었다. 사격훈련 시 이 분야에서의 비행대장과 박 대위의 점수 차는 소수점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대대장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박 대위로 바꿀 수밖에 없었음을 단장에게 역설했다. 주변 환경이 급박하게 바뀌면 일정하고 꾸준한 점수를 내는 조종사가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과 왠지 박 대위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단장은 수긍할 수 없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상황이라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대대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갑자기 악화된 기후로 참석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평소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부담감에다 급작스럽게 바뀐 환경은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많은 조종사들이 바뀐 기후에 적응을 하지 못해 8.0점 대 이하 성적을 낼 때 오로지 박준산 대위만이 평소대로 종합 평점 8.54점을 얻었다. 1위였다.


 

뭔 생각을 그리 꼴똘하게 해, 어여 한 잔 따라봐” 성구는 준산에게 잔을 내밀었다.

준산이 조금 남은 술을 따를 때 주인장 남편이 막걸리 두 통을 가져왔다. 비다시피한 선지국 그릇을 본 남정네는


“국 쫌 리필 해주까예”라고 말하더니 다짜고짜 국그릇을 가게 밖 가마솥으로 가져가더니 뜨끈뜨끈한 선진국을 넘칠 만큼 담아 왔다. 그러더니 가지 않고 성구와 준산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알딸딸해진 이 남정네는 단골 손님이자 술친구들이 가 버리자 어떻게든 자리에 끼어 한 잔 더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사장님, 막걸리 한 잔 하십시오” 낌새를 알아차린 성구가 빈 잔을 건네며 청하자, 이 남정네는


“딱, 한 잔만 묵고 가께예”라 말하며 만면에 사람 좋은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 앉지도 않고 가득 따라진 막걸리 한 잔을 가볍게 원샷하더니 손으로 족발 한 점을 집어 쌈장에 찍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선 환히 웃으며


“잘 먹었슴미데이,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이소”라고 말하며 가게 밖으로 나가더니 담배를 척 꺼내 물었다. 이 모습을 본 준산도 담배가 확 땡겼다.


“형님, 담배 한 대 피우겠습니다” 준산은 007 가방을 자신의 무릎 쪽으로 끌어 당겨 열더니 반 쯤 남은 보그 담배를 꺼냈다.


“대단혀, 대단혀, 준산이 넌 대한민국 조종사 중에서 완벽한 1%여, 전투기 조종사 중에 담배 피우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껴” 성구는 놀리 듯 말했다. 준산은 그런 성구를 보며 싱급게 웃었다.
불을 부치고 한 모금 길게 빤 준산은 성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형님,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준산의 말에 성구는 술을 마시면서도 눈을 크게 뜨고 준산을 쳐다보았다.


“머여, 그 고민이란 거이, 어여 말해 봐, 내가 니 고민 해결사잔여, 잠깐 그 야그 듣기 전에 머 하나 더 시키야제” 술잔을 내려 놓은 성구는 벽에 걸린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준산은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물었다. 담배 필터의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로 전해졌다. 취기가 올라 얼굴이 발그스레진 준산은 문득 담배 필터가 연애 시절의 상희 젖꼭지처럼 여겨졌다. 선분홍색의 자그만 젖꼭지에 행여 생채기를 낼 새라 준산은 부드럽고 또 부드럽게 입술로 애무를 했었다. 그때마다 상희는 몸을 살짝 떨며 가늘고 길게 신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