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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파더>/소설<파더> 1장

[소설 '파더'] 제1장 아이니 중식당

by 뉴클리어 2011. 2. 16.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가족을 주제로 소설을 한 번 써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은 영화 ‘마더’를 본 후 더 강렬해 졌었는데 마음뿐이었다. 대략적인 구도는 거듭된 상상으로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 살을 갖다 붙여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낙서장에 몇 번 끄적여 봤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이내 관둬버렸다. 혼자는 안 되는 것이다, 어려운 것이다.

작년 추석에 텔레비전을 없앤 후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또스또옙스키의 대표작들(까리마조프의 형제들, 악령, 백치) 섭렵 후 레마르크에 필이 꽂혀 전집 채로 읽었다. 절망이었다. 내깐 놈이 무슨 소설이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다가 너무 무거운 책만 읽는다 싶어 황석영의 ‘강남몽’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을 들었는데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지 않겠냐는 대책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두 분께 삼가 죄송하단 말씀 올립니다.)



현대사회에서 비극적인 인간사의 많은 부분은 가족의 해체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어미를 죽인다. 남을 죽이고 자신을 죽인다. 가족은 공동체의 끝이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이 공동체의 끝에서조차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위험한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 하물며 그러한 가족마저 없다면?


영화 ‘마더’가 모성을 얘기했다면 이 소설은 ‘부성’ 즉 아버지가 가족을 대하는 방식을 다룬다. 조그만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가장의 처절하고도 애절한 몸부림을 얘기한다. 소설은 재미를 위해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을 갖추려 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십 수 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버지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얼마나 갈지 나도 모른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과연 반까지라도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일단 시작해본다.



등장인물

박준산 대위 : 주인공, 현역 공군 대위,  보라매 공중 사격대회에서 1등하여 최연소 탑건에 오름.

김상희 : 주인공의 아내. 경남개발 김승갑 회장의 무남독녀

박민수 : 주인공의 아버지, 박준산 대위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전영옥 : 주인공의 어머니,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의 야심만만한 현역 국회의원,  박민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당시 정권 실세였던 원세훈 의원과 재혼한다.

원세훈 : 주인공의 의붓 아버지. 은퇴한 정치인, ‘나라사랑 전국연합’이라는 우파 시민단체의 회장이자 전영옥의 정치적 후원자

강승재 : 박민수의 절친한 고향 친구,  전직 경기 성남경찰서 형사반장.

황승호 : 박민수의 절친한 고등학교 친구, 대전에서 조그만 세탁소를 운영한다.


p.s 혹 가능하다면 끄적일 수 있는 공간 하나 마련해주삼.




 

 

공군사관학교 대 강연장에는 수백 명의 생도들이 카키색 예복을 입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정면 연단 중앙에는 단상과 그 옆으로 학교장과 강연자가 앉을 두 개의 원목 의자가 놓여 져 있었다. 열 댓 명의 교수들과 훈육관이 이미 들어 와 강연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 강연장 맨 앞좌석 열은 교수, 뒷좌석 열은 훈육관 들이 차지했다. 보통 외부 강연이 있을 시에는 생도들이 정복 차림으로 참석하기 마련인데 이 날은 달랐다. 예복은 아주 특별한 날에만 입는데 장관급 이상의 귀빈이나 임석상관이 중장 이상의 고위 간부가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가 그런 경우이다. 하지만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공군은 매년 전투 조종사들 중 최고 조종사 즉 탑건을 선발한다. 탑건이 되기 위해서는 한 해 동안 비행훈련, 비행경력, 작전참가, 사격능력, 비행안전 기여도 등 10가지 필수요소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전투기 조종사들뿐만 아니라 공사생도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선망의 자리였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명예생도회의 주관으로 그 해 탑건에 오른 선배 조종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데 최고 조종사에 대한 최고의 예우 차원에서 전 생도들이 정복이 아닌 예복을 입었던 것이다.



“이제 곧 학교장 님과 올 해의 탑건이 되신 38기 선배님이신 박준산 대위 님께서 입장하실 예정입니다. 교수님, 훈육관 님, 전 생도는 일동 기립하여 주십시오” 생도대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대 강연장 현관 입구에는 일반 병 둘이 초병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이들의 큰 경례 구호가 강연장 안까지 들려 왔고 이 소리를 통해 생도대장은 학교장과 박준산 대위가 막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학교장실에서 홍차와 수제 양갱을 겻 들인 간단한 다과를 마친 박준산 대위와 학교장 김기훈 소장은 별 두 개 짜리 계급판을 단 검정색 세단에서 내려 학교장 전속부관의 안내로 대 강연장 중앙 현관으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대 강연장 중앙 현관에는 양 옆으로 사진이 쭉 걸려 있는데 입구에서 왼쪽 벽으로는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작전 중 순직한 조종사들로 빼곡 했고 오른쪽으로는 열 세명의 역대 탑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제 곧 박준산 대위의 사진도 오른쪽 벽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중앙 현관을 스쳐 지나며 박 대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런 순간을 꿈꿔왔지만 이런 순간이 오리라곤 상상하지 않았다. 그건 3년 전 있었던 사고 때문이었다. 2008년 1월, 강릉사격장에서 공대지 사격임무를 마치고 김해 공군 17전투비행단으로 복귀하던 중, 자신이 몰던 F16 전투기가 포항 상공에서 엔진이 멈춰 버린 것이었다. 비상 엔진도 가동되지 않았다. 박 대위는 본능적으로 기수를 동해상으로 틀었다. 죽어도 혼자 죽어야 했다. 그렇게 배웠다.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죽음을 앞둔 조종사의 마지막 임무였다. 비행기는 구룡포 앞바다에 추락했고 박 대위는 비상탈출 했다. 때마침 조업 중인 어선이 근처를 지나갔기에 박 대위는 연명할 수 있었다. 사고 후 박 대위는 모든 비행훈련 일정에서 제외 되었고 정비 팀 전원과 함께 청주 전투공군사령부 합동사고조사반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합동사고조사반에서는 3개월 동안 정비팀의 점검부실과 조종사의 과실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6개월 후 다행히 사고 원인이 엔진결함으로 밝혀 져 박 대위는 원대 복귀할 수 있었다. 박 대위는 운이 아주 좋은 편에 속했다. 명백한 기체 결함으로 밝혀지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제조사는 결코 자신들의 결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웬만한 사고는 원인이 명쾌히 밝혀지지 않고 애매하고 두루뭉실하게 처리 되는데 이럴 경우 부담은 고스란히 조종사 몫이었다. 사고 전투기 조종사들은 원대 복귀를 강력히 원하지만 수송부대로 전출되게 마련이고 더불어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진급 심사에서도 늘 불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도 운 좋은 경우에 속한다. 비상탈출 시 캐노피가 열리지 않아 기체와 함께 생을 마감한 선,후배 조종사들도 드물지 않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도 손톱만큼의 조종사 과실이 인정될 경우에는 산 것이 아니었다. 조종사 과실은 곧 불명예제대로 이어진다. 불명예 제대자에겐 연금 수혜 자격이 박탈된다. 이들을 채용해 줄 민간 항공사는 없다. 행복했던 한 가정이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적지 않은 조종사들이 사고 시 기체와 함께 생을 접는다. 군 수뇌부는 죽은 자에겐 관대하다. 죽는 순간까지 조종칸을 놓지 않고 기수를 강이나 바다로 틀어 대형 인명피해를 막은 영웅으로 만들어 놓는다. 일계급 특진에 순직처리는 많은 날을 살아야 할 가족에겐 복음이다. 매달 궁핍하지 않게 살 정도의 연금이 지급되며 미망인들에겐 본인이 희망할 경우 군무원으로 특채 된다. 



“학교장 님에 대하여 받들어~~~ 총!!!”


“다안~ 결!”


생도대장의 구령에 전 사관생도들은 하나의 동작으로 구호와 경례를 했다. 사관생도를 향하고 있었던 생도대장은 경례 동작을 지켜본 후 절도 있게 뒤돌아섰다. 그 동작은 마치 기계와 같았다. 생도대장은 머리를 15도 각도로 들어 연단의 학교장을 향했다. 그리곤 짧고 굵게 경례를 붙였다. 학교장 김기훈 소장의 소개사는 거창했다. 박준산 대위가 3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실, 전투비행단에서도 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는 것을 열거했다. 무엇보다 학교장은 박 대위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기수를 틀어 민간에 피해를 주지 않았던 점을 강조했다. 박 대위를 본받아 모든 조종사들은 목숨을 걸고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때였다. 박 대위의 휴대폰이 짧게 한 번 흔들렸다. 연단 단상 왼쪽 원목의자에 앉아 있던 박 대위는 주위를 한 번 둘러 본 후 오른쪽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를 확인한 박 대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석이랑 서울에 가 있을 께 연락할 필요 없어 전화긴 꺼둘꺼야] 아내 상희의 메시지였다.



저녁 만찬을 끝으로 사관학교에서의 공식적인 행사는 모두 끝이 났다. 준산은 오후 아홉 시쯤 학교 연회장 옆에 위치한 귀빈 숙소로 돌아왔다. 새로 지은 3층 짜리 귀빈 숙소는 준산이 생도 생활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깨끗했다. 3층은 전체를 영빈관으로 썼고 1,2층은 20평정도 규모로 두 개씩 두었는데 하나는 온돌, 다른 하나는 침대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준산은 침대가 있는 2층 1호실에 머물렀다.    


상희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서울 처갓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역삼동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낭랑한 장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박 서방입니다. 잘 계셨습니까?”


“아이구~ 우리 사위 아닌가” 크고 밝았다.


“연락을 자주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버님도 별고 없으시지요”


“그래 우린 잘 있네, 그나저나 석이 어멈과 무슨 일 있었나, 아까 오더니 2층 방에서 내려 올 생각을 안 하네, 이 시간까지 저녁 먹을 생각도 안 하고”


“죄송합니다. 별 일 있었던 건 아닙니다. 내일 찾아 뵙겠습니다. 모레까지 휴가입니다.”


“그래, 그래, 내일 만나서 얘기하세나,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지 우리 사위 좋아하는 삼계탕 준비해 놓겠네”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휴대폰을 거실 탁자에 던져 놓고 준산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깊게 한 모금 빨았다.



적어도 준산을 만나기 전까지 상희는 중견 건설업체의 회장 딸답게 부족한 것 없이 곱게 자랐다. 상희를 처음 만난 것은 2학년 여름 주말 외박 때였다. 두 집안끼리의 저녁 모임이 종로에 있는 중식당 아이니에서 있었다. 건설업체 회장인 상희의 아버지와 3선의 국회의원이었던 의붓아버지 원세훈은 막역한 사이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함께 다닌 절친한 동창이었다. 그해 봄 아내와 사별하고 10여년을 홀로 지내던 원세훈은 그의 정책보좌관이었던 준산의 어머니 전영옥과 재혼을 했다. 준산의 아버지 박민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딱 2년 후였다. 자리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당시 상희는 건설업체 회장 딸답지 않는 수수한 차림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단발머리와는 묘한 대조를 이루었지만 꽤 어울려 보였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이었지만 활달했다. 젓가락을 깨작거리는 준산과는 달리 상희는 이것저것 잘 먹었다. 식사로 나온 짜장면까지 말끔하게 비웠다.



준산은 다시 상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여전히 꺼져 있었다. 다시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그러니 전역을 하면 되잖아, 난 이제 도저히 못 살겠어, 불편한 거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있단 말이야, 당신 기다리는 거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왜 그년한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해! 그년이 뭔데 뭐냐고!' 눈이 퉁퉁 분 채로 울부 짖던 상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2011.02.16)




“그년이라니!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준산은 눈을 부라리며 상희를 노려보았다.


“왜, 그년은 나에게 이년저년 하는데 난 왜 못해 왜 못하냐고!”


40세대의 4층 짜리 낡은 B.O.Q는 기본적인 방음도 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옆집의 조그만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도 상희는 누가 듣고 비행대장 사모에게 전하라는 듯 악에 받혀 쌍소리를 내 뱉고 있었기에 준산은 이만저만 곤혹스런 게 아니었다. 비행대장 가족이 거주하는 숙소는 B.O.Q 맨 끝에 위치하여 준산의 집과는 두 라인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비행대장 사모가 상희의 악다구니를 직접적으로 듣지는 못했겠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장교 부인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제발 입 좀 닥쳐! 입 좀 닥치라구” 준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2011.02.18)

그날 아침, B.O.Q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행대대장의 관사에는 장교 부인들로 북적였다. 17비행단 209비행대대 신임 대대장의 이사가 있던 날이었다.이사짐이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비행대장 아내인 손명선의 진두지휘 아래 젊은 장교 부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행대장의 아내는 키가 컸고 뼈대가 굵었다. 얼굴은 광대뼈가 양 옆으로 튀어 나와 각이 졌다. 고등하교 배구 선수 출신이며 경북 영천이 고향인 비행대장 아내 손명선은 눈치가 있고 상황 판단도 빨랐다. 말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경상도 쎈 억양이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표준말을 향한 그녀의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어서 웬만해서는 사투리가 나오질 않았다. 209비행대대는 4개의 편대로 구성되어 소령급이 편대장을 맡는다. 이들 중 최고참 편대장이 비행대장을 맡게 되는데 남편이 비행대장이면 아내도 비행대장이었다. 실제로 편대장 부인들 중엔 비행대장의 아내보다 나이가 더 많은 이도 있었지만 공,사석을 불분하고 그녀에게 ‘형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예우를 했다. 상희는 화장실과 주방을 맡았다. 화장실엔 누런 때 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는데 일반 세제로는 어림없었다. 락스를 듬뿍 묻힌 솔로 빡빡 긁자 그제서야 때 자국이 일어났다. 화장실 구석구석 세제질을 했다. 거품이 화장실 전체를 덮자 상희는 고무호스를 화장실 수도꼭지에 연결하여 세게 틀어 물을 뿌렸다. 물이 닿은 화장실 벽이며 바닥 타일이 반질반질해 졌다. 상희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청소를 하면서도 상희는 관사 마당을 몇 번이나 쳐다보곤 했는데 다섯 살 배기 아들 수석이 잘 놀고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희는 마당 구석에서 집에서 가져 온 트럭, 불도져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고 있는 꼬맹이를 보면서 속이 상했다. 전 날 밤부터 열이 있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다행히 아침에 열은 내렸지만 행여 심해질까봐 유치원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점심시간이 다 되 갈 때 쯤, 상희가 화장실 청소를 끝 내고 막 주방으로 들어설 때 관사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자기들 어서 나와 봐”  


명선은 청소하는 장교 부인들을 향해 큰 소리로 한 마디 던지고서는 재빠르게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다음 주위를 둘러보더니 잰 걸음으로 관사 옆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래 세차를 안 해 먼지가 뿌옇게 묻어 있는 검정색 그랜져 후미가 주차장 안쪽으로 느릿느릿 들어서고 있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오기 전 대대장 아내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사모님 오신다고 너무 수고하셨어요”


신임 대대장 아내가 운전석에서 채 내리기도 전, 명선은 90도 각도로 허리를 최대한 숙인  채 인사를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현 정권의 실세 정치인이 최근 보이는 인사법과 너무도 흡사 해 보였다.


“오~ 자기가 비행대장이구나! 수고가 많지?”


대대장 아내는 엉덩이가 크고 볼록한 것에 비해 허리는 가늘었고 하체보다 상체가 작아 남자들이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오는 전형적인 한족의 체형이었다. 큰 눈이 조그만 얼굴과 대비되 돋보였고 윗 입술이 성형을 한 듯 인중 쪽으로 살짝 말린 듯 올라가 나이에 비해 훨씬 어려 보였다. 시원시원한 명선의 신체와는 모든 것이 대비 되어 보였다. 막 라운딩을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들어서는 사람처럼 신임 대대장의 아내는 남색 스판 바지, 왼 가슴 쪽에 두 마리의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일제 바람막이에 분홍색 실크 목플러를 하고 있었다.


“상수, 다 왔어 이제 내려야지”


명선과 인사를 주고받은 대대장의 아내는 차 뒤쪽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뒷자리에는 신임 대대장의 일곱 살 짜리 늦둥이 아들이 머리를 시트에 파묻고 자고 있었다.


명선은 얼른 차 뒷문을 열었다.


“어머, 우리 도련님도 함께 오셨네요, 아휴~ 자는 모습도 어찌 이렇게 깜찍해요, 사모 님 제가 안고 갈 테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명선은 벌써 허리를 굽혀 곤히 잠든 아이를 조심스레 차 뒷좌석에서 살살 빼 내고 있었다.


“아이~ 깨우면 된다니까, 힘들게 왜 그래, 그냥 깨워” 나무라는 투로 얘기했지만 싫지만은 않는 표정이었다.


대대장 아내와 아이를 안은 명선이 관사 안으로 들어서자 일렬로 도열해 있던 장교 부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사모님 반갑습니다.”


그리고선 두 손을 배에 댄 채 상체를 빳빳이 하고 허리를 숙여 대대장 아내를 향해 인사를 했는데 이는 사전에 연습까지 몇 번 한 명선이 낸 아이디어였다.


“그래, 그래 자기들이 너무 수고가 많아, 이러지 말라고 했는데....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자비롭고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대대장 아내는 장교 부인들을 쭉 둘러 보았다.   그리고선 익숙한 동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끔히 치워진 관사 거실에는 명선이 자신의 집에서 직접 가져 온 체크무늬 보가 덧 씌워진 캠핑용 테이블과 다기가 있었는데 대대장 아내 앞에는 꽤나 비싸 보이는 조그만 사기 찻잔 하나가, 자신을 비롯한 장교 부인들 앞에는 녹차 티백이 담겨 진 일회용 종이컵이 쭉 놓여져 있었다. 명선은 미리 데워 놓은 물에 한 번 다려 놓은 보아차를 대대장 아내 앞에 놓여 진 앙증맞은 잔에 조심스레 부었다. 그새 잠에서 깬 대대장 늦둥이는 마당에서 수석과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2011.02.20)


“너무 고마워, 김해는 처음이거든, 이사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자기들이 너무 신경을 많이 써주는 것 같애, 감동이야” 대대장 아내는 왼 손으로는 차 잔을 곱게 받쳐 한 모금 마시고서는 예의 그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아휴~ 아니에요,” 명선은 깜작 놀란 듯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자기 자꾸 그러면 나 화낸다. 대대장님이 진급하시고 이사가 지금까지 딱 세 번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봐, 자기 너무 야무진 것 같애,” 대대장 아내는 명선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며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고, 명선은 황송한 듯 머리를 조아렸다. 명선은 장교 부인 남편의 관등과 직책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와중에서도 대대장 아내의 차 잔이 비워지면 재빠르게 채웠다.


“근데 참, 사모님 시간 다 되 가는 거 아니에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명선의 얘기에 대대장 아내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다소곳이 앉은 장교부인들을 둘러 보았다.


“내가 이래도 되는 지 몰라, 하필이면 단장님 사모님이 오늘로 날짜를 잡는 바람에....”


대대장 아내의 뜬금없는 얘기에 명선을 제외한 장교부인들은 서로의 눈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어휴~ 사모 님, 여기 일이랑 아무 걱정 마시고 마음 푹 놓으시고 운동하고 오세요, 이사짐 직원이 세 명이나 온다면서요, 저희들이야 정리만 해 놓으면 되는데, 그게 무슨 일인가요, 제가 알아서 다 해 놓을 테니 걱정일랑 접어두세요 사.모.님”



그제서야 상희를 비롯한 장교 부인들은 대략 상황 판단이 되었다. 부대 옆에는 총거리 2,300미터인 9홀 짜리 군 골프장이 있는데 민간인들에겐 체력단련장이라 알려진 곳이었다. 여기서 장교 부인들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15,000원이면 이용할 수 있었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장교 부인들의 회합과 사교의 장소로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상희는 속이 메스꺼워 옴을 느꼈다. 아무리 계급이 왕이라지만, 남편이 스타면 아내도 장군처럼 행동하는 군대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싶었다. 이삿날 주인이 손도 까닥 않는 거야 백 번 양보하여 이해를 한다손 치더라도 이사 당일 날 비행단장 사모와의 골프를 핑계로 아예 손을 놓아버리겠다는 심보가 너무도 고약하게 여겨졌다. 모든 일을 제쳐 놓고 몸이 안 좋은 아들 석을 데리고 아침부터 나와 남의 허드렛일을 거들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참담하게 여겨졌다.  이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동원되어 온 자신과 장교 부인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던 손명선에겐 강한 적개심마저 일었다.


아이니 중식당에서 상희는 처음 보는 산준에게 강하게 끌렸었다. 재혼한 아저씨에게 아들과 딸이 생겼는데 그 아들이 잘 생겼다는 것과 공군사관학교에 다닌다는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때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짧게 깍은 머리, 검게 그을린 얼굴, 딱딱한 생도 복장이었지만 상희는 준산의 눈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앞에 놓고 젓가락을 깨작거리는 행동이 한편으론 귀엽게도 여겨졌었다. 같은 과 동기생 남자들보다 의젓하게 보였다. 어머니의 소개로 만난 몇 명의 재벌가 날라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해 보였다. 같은 나이라는 데서는 묘한 동질감과 연대감도 생겨났었다. 그런 준산과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몇 번의 가족 모임, 한 번의 제주 여행 때 아버지가 준산의 행동거지와 됨됨이를 세세하게 살펴보고 있슴을 상희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건설업 특성상 책상물림은 말아 먹기 딱 좋았다. 상희의 아버지는 동종의 건실한 업체들이 2세들에게 와 쉬 몰락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었다. 곱게 자라고 쉽게 성장한 2세들이 험난한 건설업계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상희와 준산의 혼사 얘기가 오갈 때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도 상희의 아버지였다. 어느 시점에 제대시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준산은 때가 되자 쉽게 프로포즈를 하지 못했다. 집안끼리 얘기가 다 끝난 마당에서도 주저하는 준산을 상희는 답답하게 여겼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고서야 준산이 왜 자신을 불같이 사랑하면서도 프로포즈를 망설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군인의 아내가 될 수 있겠냐는, 감당할 수 있겠냐는, 그 길이 얼마나 힘든가를 얘기하는 준산의 심각한 모습이 이해되었다. (2011.02.21)


“그래, 자기들 수고 좀 해줘, 마무리되는 대로 나 정말 밥 크게 한 번 살께, 정말이야, 그리고 이걸로는 맛있는 거 시켜 먹어” 대대장 아내는 관사 대문 앞에서 빳빳한 5만 원 짜리 신권 두 장이 든 흰 봉투 하나를 명선에게 내 밀었다. 그녀는 손사래 치는 명선을 향해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을 앞으로 쭉 빼며 화낼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애기 좀 잘 부탁해, 저 녀석이 워낙 낮을 가려서, 저녁 먹고 나면 내 곧 바로 올께, 이거 참 자기한테 너무 미안해서, 내 이 은혜 잊지 않을 꺼야,”


“늦게 오셔도 되요 사모 님, 식사 하시고, 차도 마시고, 천천히 오셔요, 오늘 신랑 야간 비행이라 적적한데 우리 도련님 서방 삼아야 겠어요 호호호.” 대대장 아내의 자못 진지한 얘기에 명선은 농담조로 받으며 낯간지럽게 웃었다.


신임 대대장의 아내가 정신없이 수석과 놀고 있는 일곱 살 아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막 차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어머, 사모님 잠깐만요, 잠깐만요”


명선이 급히 대대장 아내를 불렀다. 그러더니 이내 관사 안으로 들어가 조그만 손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아휴, 사모님,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뭔데?”

“간식거리 좀 준비했어요 사모님, 저기 그늘집은 음식이 형편없어요 클럽하우스는 먹을 만한데요 사모님, 운동하시다 보면 금방 허기지잖아요. 단장님 사모님은 경기가 잘 안 풀리면 꼭 단거 찾아셔요, 적당할 때 내 놓으시면 좋아하실 거에요.” 명선은 개 당 만원 가까이 하는 고다이바 쵸컬릿 여덟 개와 삶은 계란, 요구르트가 인원 수 대로 든 보라색 골프용 손가방을 내밀었다. 


“..............”


대대장 아내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명선을 쳐다 보았다. 그 시선엔 이 여자 보통내기가 넘는다는 본능적인 경계심과 이제야 제대로 된, 뭘 좀 아는 후배를 찾았다는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대대장 아내는 관사로 오기 전 미리 봐 둔 골프장으로 차를 몰았다. 평일 점심시간 무렵이었지만 주차장엔 민간인 차들로 꽉 차 있었다. 장교들의 체력단련을 목적으로 생긴 골프장이지만 평일에는 소정의 절차를 거친 민간인들에게 개방했다. 클럽하우스 현관 입구에는 서너 명의 캐디들이 나와 내장객들의 골프백을 차에서 내려 옮겨주고 있었다. 골프백을 내리고 주차장에 차를 댄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비행단장 사모 일행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을 20분 쯤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는 조수석에 있는 명선이 준 손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선 손가방을 핸들 위에 걸쳐 놓고 열어 보았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쟈크를 다시 채우고선 차에서 내렸다.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았다. 그녀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피식 웃었다. 


김해 공군 17전투비행단 단장은 남편이 경남 사천에 위치한 제7 전투비행단 205비행대대에서 고참 대위로 근무할 때 대대장으로 모셨던 상사였다. 당시 대대장 사모 그러니 지금 만나려고 하는 비행단 단장의 아내는 부대 내에서 알아주는 여자였다. 성격이 깐깐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그녀에게 편대장 아내들은 벌벌 떨었다. 간혹 그녀가 차나 한 잔 하자며 심심풀이 땅콩으로 -말딴 대위의 아내는 대대장과 편대장 아내들이 노는 물에 낄 수 없고 험한 일 할 때나 불려나가 몸빵하는 처지였다.- 자신을 부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이년저년하면서 편대장 아내들을 험담하곤 했었다.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관사 청소를 해주었고 공,사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려가 거들었지만 당시 대대장 아내는 늘 뭔가가 불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꼭 짚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편대장 아내들에겐 가혹하게 대하면서도 유독 자신에겐 너그러웠었는데 그 이유를 남편이 중령 진급하고 대대장 보직을 맡고서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하여튼, 그런 여자, 감히 얼굴 들고 마저 대하기조차 어려웠던 그 여자를 이제 비행단 단장의 아내와 비행대대 대대장의 아내로 9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클럽하우스 현관 입구에 서 있는 그녀 앞으로 제너시스 한 대가 슥 지나가 멈췄다. 캐디 둘이 다가가자 트렁크가 열렸고 곧 뒷좌석 오른쪽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 쪽을 향해 제17 전투비행단 209비행대대 신임 대대장의  아내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관사 앞에 도착하자 주인 없는 이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네모 반듯한 푸른색 플라스틱 박스 상단에는 거실, 주방, 안방 등의 큼지막한 글자가 검정색 매직팬으로 쓰여져 있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에서 남자 두 명, 여자 한 명이 내렸는데 두 명의 남자는 짐을 내려 관사 안으로 운반했고 같이 온 한 명의 여자는 주방용품이 담겨 진 박스를 먼저 풀어 대접이며 접시를 관사 주방 여기저기에 쌓아 놓았다. 상희는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이삿짐센터 여자를 도와 찬장 정리를 했고 다른 장교 부인들도 각자 맡은 거실이며 안방에 이삿짐 직원이 옮겨 놓은 플라스틱 박스를 풀고 내용물을 꺼내어 꼭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듯 익숙한 모습으로 장롱이며 수납장을 차곡차곡 채워 넣고 있었다. 상희는 틈틈이 거실로 나가 관사 마당 쪽을 쳐다보곤 했는데 다행히 아들 석과 신임 대대장의 늦둥이가 뛰어 다니며 잘 놀고 있었다. 비행대장의 아내도 대대장 늦둥이 돌보랴 장교부인들이 이삿짐 정리를 잘 하고 있는지 나름 이것저것 지시하고 챙기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희가 주방 정리를 끝낼 때쯤이었다. ‘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퍽’하는 소리가 낫다. 이어 비행대장 아내의 “야이~ 새끼야‘하는 째지는 듯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짝‘하는 소리와 ’엄마‘하는 익숙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상희의 귓가를 때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관사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관사 마당 한 구석에서는 오른쪽 뺨이 벌게 진 아들 석이 퍼질고 앉아 엉엉 울고 있었고 두 손으로 양 쪽 눈을 싸매 잡고 울고 있는 대대장 늦둥이을 명선이 얼싸  안고 달래고 있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형을 때려, 응, 너 죽고 싶어”


상희가 지켜보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명선은 표독스럽게 말하며 수석을 노려보았다. 이 광경을 지켜 본 상희는 온 몸의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엄마’하고 울음을 꺽꺽 삼키며 아들 석이 그녀 쪽으로 달려오지 않았으면 그대로 쓰러졌을 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까이 온 아들 석의 오른쪽 얼굴에는 너무도 선명하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아니 형님, 어떻게, 어떻게, 아이에게, 이럴 수, 이럴 수, 있어요!” 한 쪽 무릎을 꿇고 아들 석을 껴안은 상희는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자 말이 목에 컥컥 걸려 잘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힘을 줘 딱딱 끊어가며 명선에게 따졌다.


“이거 안 보여, 안 보여, 안 보이냐구, 어디 쪼끄만 게 주먹질이야 주먹질이, 이 새끼를 그냥” 명선은 훌쩍이고 있는 대대장 늦둥이 아들의 양 어깨를 잡고 앞으로 쭉 밀어 얼굴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며 말하더니 다시 석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상희는 입을 꼭 다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방에 놓아 둔 손지갑을 챙기고 아들 석이 벗어 놓은 점퍼를 입혀 쟈크를 목 까지 쭉 올리더니 석을 벌떡 들어 안고서는 마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장교 부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지켜보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야! 어디가, 어디가!” 관사 대문 밖을 나서는 상희의 뒤에 대고 명선이 소리쳤지만 상희는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타고 온 마티즈 승용차 뒷자석에 아들 석을 태웠다.


“이게, 내 말이 말같이 안 들려 응” 주차장까지 따라 온 명선은 운전석 문을 열려는 상희의 오른쪽 팔을 확 낚아 채 돌려세웠다. 


“야! 너, 갈 때 가더라도 사모님한테 빌고는 가야 할 거 아냐” 목소리를 줄여 낮게 깔아 위협조로 말했다.


상희는 고개를 숙이고 한 숨을 푹 쉬고서는 피식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비웃는 듯한 눈으로 명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서는 경멸스럽다는 듯 한 마디 쏘아부쳤다.


“너, 그렇게 살고 싶냐”


상희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전혀 예상치 못한 명선은 순간 당황했다. 상희는 부인들끼리의 술자리 회합이나 모임에서도 존재감이 있는 듯, 없는 듯 말이 없었지만 뭔 일을 시키면 야무딱지게 잘 했다. 고분고분 자신을 잘 따랐던 것이다. 그런 상희가 감히 한참 고참인 자신을 향해 반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그것도 모욕적으로.    


“머시라꼬, 이 년이 니 지금 머라켄노” 얼굴이 벌게 진 명선은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 나왔다. 분을 못 이겨 팔을 어깨 뒤로 한 참 크게 꺽어 상희를 때리려는 시늉을 하자 그때까지 지켜보던 2편대장 부인이 “형님, 참으세요”라며 명선을 얼싸안아 상희에게서 떼 놓았고 이와 동시에 다른 장교 부인이 상희를 크게 나무라면서도 눈짓, 손짓으로 빨리 자리를 떠라는 시늉을 했다. (2011.2.22)





  


준산이 남부 고속터미널에 내렸을 땐 해걸음 무렵이었다. 터미널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인도 중앙에는 시멘트로 만들었을 법한 두껍고 둥그런 화분이 다섯 걸음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죽 늘어서 있었고 색색의 이름 모를 봄꽃이 심어져 있었는데 물을 제때 안 줬는지 시들해보였다. 오히려 여기저기서 보도블럭 틈새를 뚫고 나와 꽃을 피우고, 웅크리듯 그 꽃잎을 거두어들이고선 솜사탕 같은 홀씨를 활짝 펼치고 있는 민들레가 더 싱싱해 보였다. 지하철 입구로 들어설 때 쯤 전화기가 울렸다.


“어이, 아들, 어디야” 장인 김승갑의 밝고 살가운 목소리였다. 김승갑은 늘 친아들을 대하 듯 준산을 불렀다.


“아, 네, 아버님 지금 지하철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준산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얼마 만에 보냐 이 넘아, 그냥 집에 가면 섭하지, 소주나 한 잔 하고 들어가자, 집 근처에 껍데기 집 하나 생겼던데 괜찮더라고”


준산은 삼계탕을 준비해 놓겠다는 장모의 말이 생각 나 잠깐 망설였다.  


“집에는 니하고 술 한 잔 하고 들어간다고 내가 얘기 해 놨어, 니 장모 집에서 마시라고 난리던데 집에서 어디 술맛이 나냐, 삼계탕은 나중에 해장하지 뭐, 지금 지하철 역 입구면, 가만 보자 음, 한 이십분이면 도착하겠네, 올라가는 골목 입구에 보면 오른쪽에 가은실비라고 있을 꺼야 그기서 봐, 나도 지금 막 나가는 길이야”  


“예, 알겠습니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김승갑은 짤막한 키에 체격이 땅땅했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가 술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된통 당하기도 했다. 건설업체 회장이나 사장들은 업의 특성상 대부분 술을 잘 마셨다. 한국건설협회 회원들, 그러니 제법 규모를 갖춘 업체 오너들 사교모임에선 이른 바 텐텐클럽에 한번이라도 가입을 했느냐 아니냐를 우스개로 따지기도 했는데 여기서 텐텐은 점심 식사 전 입가심으로 소맥 폭탄 열 잔, 반주로 소주 열 잔 마시는 것을 의미했다. 김승갑은 이 클럽의 지존이었다. 물론 컵은 맥주잔이다. 김승갑이 건설업체 임원들과의 첫 상견례 자리의 일화는 유명했다. 김승갑의 경남개발과 지방의 신생업체 하나가 도급 순위 100위 안에 처음으로 들게 되자 이 두 회사 오너를 축하 해 주기 위해 협회 상근 부회장이 협회 고참 임원과 함께 안양베네스트에서 골프 모임을 열었다. 운동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전복찜을 메인으로 한 만찬이 있었는데 소주 한 잔에 얼굴이 발게진 김승갑을 보고 ‘그래 가지고 밤 샐 수 있겠냐’며 술고래로 소문난 상근 부회장이 슬쩍 농을 던진 것이다. 김승갑은 2차는 자기가 모시겠다며 강남의 단골집인 백야로 일행을 데리고 가 병권을 잡은 자신이 맥주 잔 여덟 개를 일렬로 쭉 늘어놓고 발렌타인 21년산 위스키를 가득 채우고선 아가씨 몫까지 돌렸다. 언더락도 하지 않은 독한 위스키가 맥주잔으로 계속 돌았는데 다섯 잔쯤 돌자 아가씨들이 먼저 밖으로 뛰쳐나갔고 열 잔째에서 임원과 함께 간 업체사장이 열다섯 잔째에서 협회 부회장이 뻗었다. 도와주려는 웨이터를 밀치고 일행 하나하나를 대기하고 있던 차까지 부축해가 차에 태워 준 김승갑은 다시 룸쌀롱으로 돌아 와 양주 한 명을 더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나갔는데 이 모습이 무슨 개선장군처럼 보였다고 한다.


역삼역에서 내려 대로를 따라 선릉 쪽으로 200미터쯤 가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자 여닫이 문 위에 검은 붓글씨 채로 가은이라 적힌 나무판자로 만든 간판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준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둥그런 스텐레스 테이블을 닦고 있는 40대 중반의 여자가 반겼다. 개방된 주방에는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뭔가를 볶고 있었는데 고소한 냄새가 났다. 오후 여섯 시 쯤이라 가게는 한산했다. 인원수를 확인 한 여자는 주문도 하기 전에 삶은 땅콩, 물미역, 오이, 소라숙회 등이 가지런히 담겨진 접시를 가져왔는데 빨간 립스틱을 한 입술이 유난하게 보였고 목 중간까지 짙게 화장을 하였지만 그 밑으로 주름진 맨살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여닫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준산은 입구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어이, 아들” 환한 얼굴의 장인이었다.


“아버님” 준산은 급히 일어났다. 김승갑은 준산을 꽉 껴안고선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임마, 저 번 설에도 못 보고”


“죄송합니다, 아버님”


“죄송하긴, 뭐 좀 시켰나” 김승갑은 그렇게 묻고서는 생선구이와  껍데기 안주를 시켰다.


“한 잔 말아봐라, 오늘 울 아들 놈 말아주는 술 한 번 먹어보자” 승갑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맥주 마시겠습니다” 산준은 맥주 잔에 소주 반, 맥주 반을 따라 김승갑 앞에 놓았다.


두 사람은 시킨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두 병,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이제 전역해야지”


“아직 의무복무 기간이 2년 정도 남았습니다.” 장인의 물음에 산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2년 마치고 바로 전역 해, 세훈이 아니지 참, 그래 사돈 말로는 국방부에서 조종사들 의무복무기간 5년 더 연장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라는데 국회 넘어오고 심사하고 어쩌다보면 한 2년 안에 통과 되지 않겠어, 골치 아파지기 전에 준비 해”


“.............” 준산은 입을 다물고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승갑은 다시 한 잔을 쭉 들이키더니 거품이 조금 남은 잔을 준산에게 내밀었다. 준산이 두 손으로 곱게 잔을 받들자 승갑은 맥주를 콸콸 쏟아 부었다.


“준산아, 내가 요즘 제일 부러운 게 뭔지 아냐, 자식 많을 놈들이야, 오죽하면 개망나니 같은 아들놈이 맨 날 사고 쳐 죽겠다고 지랄하는 친구 놈들까지 부럽겠냐, 한 푼이라 아끼고, 한 입 던다고 니 장모 사무실 경리 보게 하다가 두 번이나 유산하고, 응,  어렵게 나은 애가 상희야, 그때 니 장모 집에 들어앉히지 못한 게 평생 후회 되, 나한테 자식 놈은 상희하고 너밖에 없어, 넌 내 친아들이야 임마, 너 그때 사고 났을 때, 응, 사고 났을 때 말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임마, 응, 내가 니 엄마, 아버지보다 더 떨었어 임마,” 승갑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죄송해요, 그때 너무 심려끼쳐 드려서...”


“준산아, 내가 니를 왜 좋아하는지 아냐, 넌 임마, 너 딱 처음 봤을 때 단단하고 의리 있게 보였어, 이 바닥은 말이야 의리 있는 놈은 살아남게 돼 있어, 잔대가리 굴리고 얍삽한 놈들, 처음에는 돈 쫌 벌지, 오래 못 가, 응, 오래 못 간다고, 내가 회사를 어떻게 키운 줄 알아, 남들 일억 줄 때 이억 줬어, 십억 갖다 바를 때 난 이십 억 갖다 발랐어, 응, 근데도 내 돈 먹고 탈난 놈은 한 놈도 없어, 검찰에 갔을 때 한 놈만 부르라고 했어, 한 놈만 부르면 회사 살려주겠다고 하더라고, 응,  B장부, 경리가 진술한 거, 돈 빼간 날짜 딱딱 맞춰 놓고 언   놈에게 줬는지 딱 한 놈만 얘기하면 일반 경제사범으로 엮어 집행유예로 풀어 주고 회사도 더 이상 안 건드리겠다는 데 안 흔들릴 놈 있냐? 그래도 난 안 불었어, 끝까지 버텼지, 1년 살고, 회사는 엉망진창 되고..., 근데 웃기는 건 말이야, 처음에 반말 찍찍하던 새파란 담당 검사 새끼가 내가 끝까지 버티니 나중엔 태도가 달라지더라고, 조서 받을 때 수갑도 풀어주고, 응, 난 내가 돈질해 놓은 지검장이 전화 한 통 한 줄 알았어, 정작 내가 돈 쳐 바른 새끼들은 입 싹 닦았지, 응, 결심 재판 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사 받으러 검찰에 갔는데 말이야, 응, 나중에 담당 검사 놈이 잠시 어딜 가자는 거야, 부장검사실로 데려가더군, 부장검사님이 차나 한 잔 하시잔다면서 말이야, 부장검사 가만 보니 어디서 한 번 봤던 거 같애, 검사장하고 운동할 때 같이 온 친구 같더라고, 응, 모른 체 했어, 내색 안 했지, 아마 자기는 날 알고 있었겠지, 걔가 뭐라는 지 알아, 응, 나 같은 사람 검사생활 오래했지만 처음이라더군, 뭐라는 지 알어, 응, 강호의 의리가 사라진 상실의 시대에 김 사장 같은 사람은 표상이 되어야 한다나 머라나, 나중에 식사나 한 번 하재, 그러면서 원래는 한 10년 구형해야는데 5년 정도 때리겠데, 응, 그럼 판사가 1년 6개월 정도 선고할 거니 괜히 항소 해 부스럼 만들지 말고 푹 쉬는 요량으로 맘 편히 가지래, 일 년 있으면 특사가 있을 건데 잘 하면 그때 나올 수도 있다더군, 1심에서 끝나버려야 조건이 딱 맞아떨어진다는 거야, 진짜 그 놈 말대로 일 년 지나니 특사가 있더라고, 응, 나와서 그 부장검사하고 담당 검사 놈 술 한 번 거하게 쐈어, 웃기는 게, 원수로 만난 놈들인데 오랜 친구처럼 여겨지더라고, 하하하,”


(2011.02.23)



승갑의 말은 느릿느릿했다. 이는 취기가 약간 돈 탓도 있지만 당시 상황을 최대한 기억해 내 가감 없이 준산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산하던 가게는 해가 기울어 간판 옆, 둥그런 갓이 씌어 진 백열등에 빛이 들자 붐비기 시작했다. 남은 여섯 개의 테이블이 금방 다 차 북적거렸다. 갑작스럽게 꼬리를 물고 손님들이 밀어 닥쳤지만 주방의 할머니와 홀의 입술 빨간 여자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재빠르게 몸을 놀렸다. 입술 빨간 여자는 손님이 들어 온 순서부터 물과 물수건을 죽 돌린 다음 다시 똑같은 순서로 주문을 받고 주방에 전달하였다. 할머니가 턱을 앞으로 내밀며 머리를 쭉 빼 주문서를 확인하고 요리를 시작하자 입술 빨간 여자는 작업대 옆에 둥근 쟁반 여러 개를 척 펴더니 인원수를 봐가며 해초, 땅콩, 해물, 양념을 접시에 담았다. 그 와중에서도 손님은 왔는데, 그러면 이 여자는 먼저 온 손님에게 갈 쟁반에다가 주문서와 물수건, 물통을 올려놓았다. 기본안주를 가져다주고 오는 길에 마지막에 온 손님에게 물통, 물수건을 내려놓으며 주문을 받았다. 동작이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여자는 손님에게 뭘 가져다주면서도 주위 테이블을 빠른 눈짓으로 살펴, 필요한 게 없는가를 묻기도 하고 상추 같은 쌈거리는 말하기도 전에 보충을 해줬다.


붉은 양념에 석쇠로 연탄불에 구운 껍데기 안주는 달지도 짜지도 않았다. 불 맛이 나고 쫀득했으며 씹을수록 고소했다. 구이로 나온 것은 아마 뽈락이나 열기인 듯 하였는데 냉동이 아닌 신물이서 그런지 속살이 하얐고 머리와 꼬리쪽이 살짝 위로 들려 있었다. 잡내가 안 나고 씹을 때 쫄깃하였는데 이 또한 간이 삼삼하여 먹기에 편했다. 준산은 간혹 안주를 먹기 좋게 해 - 생선구이의 살을 바르거나, 껍데기에 마늘, 고추를 올려 - 새 젓가락으로 승갑의 앞 접시에 놓곤 했는데, 안주를 잘 먹지 않는 승갑도 이 건 꼭 챙겨 먹었다.


“흠, 한 잔 해라” 승갑은 왼손 주먹을 입에 갖다 대고 잔 기침을 하며 오른손으로는 병을 들어 준산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웠다. “네, 아버님.” 어깨를 밑으로 늘이고 머리를 약간 숙이고 있던 준산은 허리를 펴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승갑이 따르고 있는 잔을 두손으로 잡았다.



“1년 정도밖에 살지 않아 회사 데미지는 예상한 것보다 적었어, 문제는 거래선을 다시 회복하는 거였는데 나오고 보니 내 돈은 탈이 안 난다는 소문이 이 바닥에 쫙 난거라. 큰 관급공사 나오면 경남개발 김승갑이 어려운 데 좀 도와주라고 여기저기서 은근하게 압력이 들어 갔나봐, 이미 받아먹은 놈이랑  앞으로 먹고 싶은 놈들 이었지. 그렇게 한 번 발동이 걸리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수주가 들어 왔지” 승갑은 이렇게 말하고 두 손으로 바지 주머니 주위에 올려 꼼지락이더니 “너, 담배 가진 거 있냐”며 준산에게 물었고, 준산은 파란색의 보그 담배 한 개피를 꺼내 공손하게 승갑의 입에 물려주고 불을 부쳤다.


“후우~~~~ ” 승갑은 깊게 한 모금 빨았다.


준산은 장인이 뭘 말하려는지 알고 있다. 의무복무 마치고 전역을 하라는 것이다. 장인은 자신의 시대는 지났다고, 힘도 예전 갖지 않으니 탈나기 전에 빨리 일을 배우라는 당부를 할 것이다. 준산이 이를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결혼할 때부터 몇 번 말이 나왔지만 그냥 지나가는 말들이었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혼한 지 삼 년쯤 되었을 때 상희에게 우울증이 왔다. 이때부터 가족들은 - 전영옥, 준산의 의붓아버지, 장모, 김승갑 - 준산에게 전역을 심각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준산은 그때마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2011.02.25)



 자신이 잘 하겠다. 다른 장교부인들도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이라며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다. 이후 산준의 상희에 대한 노력은 헌신적이었다. 일과 후에는 잠시도 상희와 떨어지지 않았다. 일할 때 같이 일하고 쉴 때 같이 쉬었다. 똑같은 책을 두 권 사 서로 읽고 얘기했다. 슬픈 내용이면 같이 울었고, 기쁘면 같이 웃었다. 주말엔 더 일찍 일어났다. 낙동강  변 갈대 길을 따라 을숙도 쪽으로 걷다보면 다대포 몰운대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둘은 잠시 멈춰 서 뜨는 해를 지켜봤다, 그렇게 상희의 우울증이 조금씩 나아질 때쯤 아들 석이 생겼다. 임신 3개월 쯤 입덧이 심해지자 상희는 서울 처가로 갔다. 산준은 한 달에 한 번쯤 주말에 정식 휴가를 낼 수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이것이 둘 사이를 더 애틋하게 만들었다. 모처럼 상희는 여유를 얻은 듯 했다. 무엇보다 말 많은 장교부인들의 속박 아닌 속박에서 벗어 난데서 오는 해방감이 제일 컸으리라. (2011.02.25)


“아버님,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죠” 승갑이 술 잔을 들자 준산도 남은 잔을 들며 말했다. 때마침 승갑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니 장모다” 승갑은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준산을 보고 살짝 웃었다. “알았어, 안 그래도 지금 일어나는 중이라니까, 아, 그래그래, 알았다니까, 지금 계산해야 되니까 끊어” 승갑은 얼른 전화기를 끊었다. “너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니 장모....” 승갑은 집게손가락을 세워 왼쪽 머리 옆에 갖다 댔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5월의 봄이었지만 밤기운은 싸늘했다. 언덕길로 올라가면서 승갑은 준산의 손을 꼭 잡았다.


“준산아”


“네”


“우리 세대는 응, 이제 끝났어, 우리가 회사를 키우는 방식으로는 응, 이제 안 통해 응, 물론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만” 승갑은 말을 끊더니 준산을 쳐다봤다. 


“준산아” 


“네”


“짜식” 승갑은 준산을 보고서 흐뭇한 미소를 띄며 어깨를 툭 쳤다.


대문이 열리자 준산은 남자의 정액 냄새가 확 나는 듯 했다. 구석구석 배치된 은은한 조명 위로 하얀  꽃잎이 봄바람에 날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산준의 장모 김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한테만 자식이야” 혜선은 산준을 가볍게 안아주고선 승갑을 향해 눈을 흘겼다.

“어이, 아들, 삼계탕으로 한 잔 더해야지”


“이 사람이, 어서 들어가요, 들어가,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어여 들어가” 저녁 아홉 시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도 혜선은 승갑에게 자꾸 눈을 흘기며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 왜소한 체형의 혜선은 아이보리 색상의 밝고 환한 원피스에 분홍색 숄을 어깨위에 살짝 걸치고 있었는데 꽤 어울려 보였다.

“석이는 안방에서 자고  자네 처는 2층에서 아까부터 꼼짝을 안 해, 올라가봐 배고프면 삼계탕 데워주고” 안방 문을 닫은 혜선은 준산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아닙니다, 안주 많이 먹었어요 어머님, 저도 좀 씻어야겠어요”


“그래 그럼 얼른 올라가 봐, 석이는 우리가 데리고 잘 테니, 얘기는 내일 하고”


“고맙습니다 어머님” 준산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혜선을 안았다.


2층 방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밖의 조명 빛이 통창문으로 들어 와, 정원 쪽을 보고 침대위에 누워 있는 상희의 뒷모습이 보였다. 준산은 조용히 다가가 침대에 걸쳐 앉았다.


“좀 괜찮아 졌어?” 준산은 상희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준산은 중지 손가락으로 상희의 머리 결을 귀 뒤쪽 조금씩 가지런히 모았다. 준산의 손에 뜨거운 액체가 묻었다. 상희의 어깨가 잠시 흔들리더니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준산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상희 뒤에 누웠다. 상희를 한 번 안아주고서는 자기에게로 돌려 다시 힘껏 안았다. 상희의 눈물이 준산의 얼굴을 타고 내렸다. 준산은 울컥했다. 가슴 속에서 뭔가 모르는 뜨거운 불덩이가 솟는 걸 느꼈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서 준산은 상희를 뜨겁게 안았다, 준산 역시 이내 가늘게 흐느꼈다.


2학년 방학을 막 앞둔 그해 여름날 마지막 외출, 영옥으로부터 일방적인 저녁 모임을 통보 받은 준산은 영 내키지 않았다. 이는 여동생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의붓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도 어색했는데 의붓아버지와 절친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저녁 시간을 가진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준산은 내색은 않았지만 승갑, 세훈과 오랜 지기처럼 허물없이 막 대하는 영옥이 남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묘한 이질감 같은 게 생겼다. 때문에 산준과 그의 여동생 재희는 앉아 있는 시간 시간이 고역이었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상희가 누그러뜨렸다. 상희는 수줍어하면서도 준산과 재희를 보며 가벼운 눈웃음을 짓기도 했는데, 마지막 식사로 나온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휘 젓더니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닥 비웠다. 그리고선 준산과 재희를 향해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는데 내내 굳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그들도 상희의 이 모습을 보고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니 중식당에서의 모임은 근처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제법 큰 바로 이어졌다. 어른들은 한 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룸으로 갔고, 상희와 재희, 산준은 조그만 무대 맞은 편 홀에 자리를 잡았다. 재희는 금세 상희를 언니라 불렀다. 죽이 맞은 상희와 재희는 위스키를 한 병 땃고 정복 차림의 준산은 망고 쥬스를 마셨다. 상희는 간혹 전투기에 대해, 생도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묻곤 했는데 조명이 약간 어두웠고 피아노 연주에 소리가 묻히곤 해서 준산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얘기해주겠노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상희는 머리를 앞으로 쑥 내밀며 준산을 똑바로 쳐다보고서는 이참에 날짜를 잡으라 했고 준산은 우물쭈물 얼떨결에 약속을 해버렸는데 그 순간 준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들 석의 까르르 웃는 소리에 상희는 눈을 떳다. 가운을 걸친 상희는 머리카락을 동여 메면서 마당 쪽을 내려다 봤다. 준산이 석의 두 팔을 잡고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어께에 메고선 빙글빙글 돌았다. 환하게 웃는 산준과 석의 모습을 보자 상희도 기분이 나아지는 듯 했다. 산준은 잘 웃지 않았다. 말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무뚝뚝한 사람이 연애할 때  상희가 진한 농담을 던진다거나 어쩌다 살짝 살이 부딪히면 얼굴이 빨게지곤 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 귀엽게 보였었다.  준산이 웃음을 참으려 혼자서 킥킥 댈 때도 있었는데 상희가 작심하고 웃기려 한 것이 아니라 유행이 한 참 지난 썰렁 얘기를 할 때였다. 그런 준산이 함박 웃음을 보였을 때가 있었다. 입이 귀 가까이 걸렸을 때가 있었다. 상희가 석을 가졌다고 얘기 할 때였었다. 한참 깔깔거리던 두 부자는 산 너머에 해가 걸치자 약속이나 한 듯 그쪽을 향해 섰다. 준산은 선 채로 석을 뒤에서 꼭 안았다. 그렇게 두 부자는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을 한 동안 말 없이 바라보았다.  (제1장, 아이니 중식당 끝)









수정,보완 사항]
박민수의 친구 강승재는 전직 형사반장으로 처리해야 함
[수정,보완해야할 것] 전개를 원할히 하기 위해서는 아들 석이 상희를 따라 와 관사 마당에서 놀고 있다는 내용을 미리 제시해놓아야 함.